슬픔의 눈물이 자아 인식의 눈물로

 

2013년 3월 28일

   

 

     이 여인들은 원래 여기에서 바라보도록 전혀 허락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공식적인 모임은 이들에게 금기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예수님을 성 안에서 보기를 원했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사형 선고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예수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이 되었고 그녀들이 눈물을 흘리지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여인들을 거절하신다. 그녀들의 시선이 더 이상 예수님께 머물러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 시선을 너희들 자신에게, 너희 삶, 너희 자녀들과 예루살렘 성의 운명을 위해 돌려라"고 말씀하신다.

    단지 인간들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에서 불의와 불행을 위한 것임을 인식하게 되면, 사람들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예수님의 여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회개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예수님은 이것을 십자가로 짊어지고 가신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슬픔의 눈물"을 "자아 인식의 눈물"로 변화시키신다.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죽음을 뛰어넘어 생명을 찾게 된다.

    연구에 의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자주 운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아기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여성들은 "울보"로, 남성들은 "눈물을 참는 자"로 점진적으로 발전됩니다. 연구 결과야 어찌했건, 성경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결코 눈물을 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물은 삶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도처에서 남성들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탄식 시편에서 눈물로 자신의 침실이 홍수가 나게 할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예수를 부인했음을 알았을 때, 아주 격렬하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는 큰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확신에 가득 차 울 수도 있으며, 우리 자신의 눈물을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고백해 봅니다. 성목요일이 열립니다. 확신에 찬 소망 안에서 "자아 인식의 눈물"을 마음껏 흘릴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샬~~~롬

    눅 23, 26 - 31   고전 11, 23 - 26  (지난 묵상 링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 28)

   

 

배경 찬송은 Bach의 마태 수난곡 BWV 244, "Wir setzen uns mit Tränen nied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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