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란 이름의 사랑 예술

 

2013년 4월 15일

   

 

    오늘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 - 불과 칼 그리고 가정에서 분쟁은 우리들을 숨 막히게 한다. 여기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한 고난이 반영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가정에서 더물게 분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칼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특징짓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박해에 대한 말이 없다. 하지만, 또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아무런 문제없이 평안으로 이끌 수 없다"는 것도 유효하다. 예수님의 화평은 결코 친절한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화평은 십자가 기둥에서 자라나는 생명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궁극적인 화평을 가져오신다.

    인간적인 분투는 또한 궁극적인 세상이 회복될 때까지 우리들의 삶을 특징짓게 된다. 그때까지 우리들은 잠정적인 화평을 위해 노력하고 우리들이 더 나은 것과 완벽한 것을 기다리기 때문에 기뻐하고 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날마다 뉴스에 등장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탈냉전 이후 남북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적대적인 대결과 경쟁의 분단시대에서 평화, 화해와 협력의 한반도 시대가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에서 변화를 보였으며 다방면에서 긍정적 조건들을 마련했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주목을 받고 희망을 준 변화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치부하고 "4 대강 운하건설"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정권은 급기야 개성공단 폐쇄의 상황까지 맞았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된 존 케리 미국무장관이 한국과 중국을 방문하고, 박근혜 정부도 뒤늦게나마 지난 4월 11일 새누리당 의원들과 만찬 자리에서 "북한과 대화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평통은 "내외여론을 오도하며 대결적 정체를 가리우기 위한 교활한 술책"이라고 비난하면서 대화를 사실상 거절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화평하기보다는, 안타깝게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더 상하게 하는 것이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화평보다는 여전히 분쟁이 도처에 팽배하고 있습니다. 쌍방간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용서와 대화보다 더 자유롭게 하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은 쉽게 부정적인 생각의 순환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남북간에 진정한 대화와 화해의 길이 열려서, 한반도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진정한 평화를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는 복된 새로운 한 주간이 되시길..
....  샬~~~롬

    눅 12, 49 - 53   삼상 26, 5 - 24  (지난 묵상 링크)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눅 12, 51)

   

 

배경 찬송은 "Du sollst ein Segen sein - 너희는 축복이 되어야만 할지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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