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베풀라! 하지만, 외식하는 교회에는....

 

2013년 4월 9일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던 바리새인은 놀랍게도 십일조를 했으며, 심지어 양념용 야채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드렸다. 예수님은 그를 칭찬해야만 하시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비난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등 중요한 계명이 의무에 대한 열의보다 뒤지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또한 책임감을 가지고자 한다. 그런데 많은 과제들은 처리가 지연이 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안목을 잃고 이웃 사랑을 위해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랑이 지연되는 곳에 모든 것은 헛된 것이다 (고전 13장).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맨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우리들에게 권고하신다.

    물이 우물에 날마다 가득 채워지듯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매일 당신의 자비로 새로이 채워주신다. 우리들은 두 손을 내밀고서 ' 오늘 하루, 지탱할 힘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도 된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진정한 마음으로 베풀 수 있다. 십일조도 왜 기꺼이 베풀 수 없겠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의 십일조 헌금과 이것을 드리는 마음 자세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의무감으로 양념 채소에 대한 십일조까지도 바쳤던 것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의무감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믿음의 척도 내지는 십일조 액수가 곧 믿음의 수준과 깊이를 측청하는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헌금 봉투에다 금액과 이름을 표기하고 이것을 통계를 내고 발표하기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공의롭게 관리해야 하는 사람들이 헌금에 대해 기본적으로 잘못 이해한 결과로 생겨난, 심각하게 병적으로 변질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참된 의미는 액수보다는 "
진정으로 드리는 마음"에 놓여 있고, 동시에 이 헌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지혜"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 20 --23)는 예수님의 말씀은 먼 후일에 있을 하나님 나라를 기약하는 약속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말씀은 바로 정의와 긍휼이 절실하게 필요한 세상과 소외된 자들을 위한 헌신을 권면하는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기꺼이 베풀기를 힘쓰되,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합당하게 드리고 베풀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샬~~~롬

    눅 11, 37 - 54   출 17, 1 - 7  (지난 묵상 링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눅 11, 42)

   

 

배경 찬송은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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