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사생활'에 기울어서

 

2014년 8월 14일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슬픈 일, 그 이상으로 아주 비극적이다. 그는 '술수와 폭력으로 모든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그에게 속았고 또한 그를 믿었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함으로 형제들을 살해했다. 이것으로써 자기 진영에 그 어떤 사람도 그에게 싸움을 걸 수 없게 했다. 그에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들도 정당했다. 어떻게 세겜 사람들이 이런 양심 없는 범죄자를 믿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는가?! 우리는 얼마나 빨리 한 사람의 큰 영향력에 의해 매혹당하는가!? 우리가 한 사람에게 "우리 마음이 기울기"를 원하면, 아비멜렉처럼 형제 살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형제를 구원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의 형제요, 우리처럼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을 결코 이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 마음속에 아비멜렉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번역한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9년 1월 15일 뉴욕을 정상적으로 출발했던 국내 여객기가 이륙 후 잠시만에 철새 무리를 만났고 동시에 양쪽 엔진이 모두가 고장난 사고가 있었습니다. 기장은 신속하게 허드슨 강 수면 위로 불시착할 결정을 내렸습니다. 비행기가 강 수면에 착륙한 일, 얼음과 같은 찬물에 155명의 승객 중에 단 한 명도 동사하지 않았던 일 그리고 승객은 물론 지나가던 배들과 주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도왔던 일은 모두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고 큰 두려움에 처한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았던 이 사건은 낯선 사람이 이웃들이 되었던 일은 그야말로 "허드슨 강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객기 기장의 신속한 결정과 행동과 함께, 다시 온 세계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대한민국호 선장인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행방불명된 사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 생명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완전히 수장되었을 시점인 오후 다섯시에 노란 점퍼를 한결같이 걸치고 국민들 앞에 나타나 온 국민이 아는 사실을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소름 끼치는 확인사살'을 듣게 되었을 때, 이성이 있는 국민이라면 국가에 대한 "그 끔찍하고도 야속한 배신감"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간 "사생활이다,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말할 수 없다"로 일관되었던 억측이 일본 산케이 신문이 기사화함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사생활"이라고 변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엄연하게 정상 근무 시간이었고 대한민국 대통령의 근무시간을 "사생활"이라는 말로  더 이상 모르쇠로 덮을 수 있거나 이상한 소문을 계속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치계, 특히 여당의 마음이 "사생활" 쪽으로 기울면 기울수록,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자식들을 잃은 국민들의 마음과 수 천리까지 멀어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웃들이 고난이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방관하지 않고 기꺼이 도울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삿 9, 1 - 6   잠 9, 1 - 10  (지난 묵상링크)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삿 9, 3)

   

 

배경 찬송은 "형제의 모습속에 보이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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