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못하는 원칙이라는 불통

 

2014년 6월 26일

     

 

    소위 "나는 내 자신이 보는 것만을 단지 믿는다"는 발상은 그 자체에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우리는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성경 본문에서 읽는 것은 각종 모순들에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같은 행함, 심지어 죽은 나사로나 회당장 아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깨워 일으키는 일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 왜 단순히 믿지 못할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자 하거나 자신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43절). 성경은 이렇게 보는 눈을 안보이게 하는 "완고함",  "냉혹함"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영과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움을 통해 고쳐지고 변화되는 일들에 항상 열려 있고 유동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간구해야만 한다. 또한 아울러 우리는 완전 눈먼 자들에게 아직 볼 수 있는 기적이 베풀어질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마땅히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고집불통으로 믿지 못하는 완고한 인간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과거나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던 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자신들의 사고나 생각이 시멘트처럼 아주 딱딱하게 굳어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2주 동안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창극 총리후보자가 그랬고, 이를 옹호하던 일부 목사들, 정치인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과오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기 원칙'을 지키며 남 탓으로 책임회피만 일삼는 GH가 그 대표적으로 이런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육체적으로는 변화된 새로운 시대의 모든 것들에 적응하여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적 잘못된 생각에 굳어진 사람들을 보는 일은 아주 서글프고 애잔한 일입니다. 이와 달리, 선하고 좋은 생각이나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회개한 사람을 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은 것도 믿을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요 12, 37 - 43   렘 26, 1 - 24  (지난 묵상링크)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요 12, 37)

   

 

배경 찬송은  "내 눈 주 영광을 보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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