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들 - 하필 왜?

 

2016년 9월 14일

         

  

    예레미야가 이 믿음의 구절을 노래할 수 있는 사실은 그 마음에 무엇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절망했었고 더 이상 설교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경멸과 조소를 체험했으며 복수하기 위해 그들이 어떻게 그에게 덫을 놓으려고 하는지 들었다.
    누가 이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출생일을 저주하지만, 결코 자살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깊은 절망 한가운데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가운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은 변치않고 그의 편에 서 계심을 알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예레미야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씨름했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인자한 하나님, 수염을 가진 친절한 할아버지는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 안으로 받아들이신다. 때로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각종 사명을 주신다. 예레미야의 정열적인 돌파가 이에 대해 기억하게 한다. 우리는 예언자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 편에 서 계시고 우리를 꼭 잡고서 늘 거듭해 우리를 바로 세우신다'는 확신에 머물 수 있다.

    너무 절망한 나머지 더 이상 탈출구를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안타까움을 다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믿을만한 단 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 극단적 결정을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강한 믿음도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는지 묻게 됩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스스로 찾기 전에, 먼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은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벌하시는지요?! 매일 자식을 위해 기도했었는데, 이제 무엇을 위해 기도하란 말입니까?"라며, 절망에 몸부림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아픔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위해 간구합니다. 삼천 만 이상이 부모와 고향을 찾아 움직이는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풍성한 절기에 절망에 빠진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낼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렘 20, 7 - 18   요 18, 3 - 9  (지난 묵상 링크)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렘 20, 11)

   

   

 배경 음악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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