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거나 침묵하지 말지니

 

2015년 5월 11일

     

    우리 자신들의 이웃에 대한 책임감을 상기시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고 반응을 한다. 이들은 마치 가인처럼 행동하며 말하는 것이다.
   
가인은 먼저 동생 아벨을 살해했었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주님은 목자를 스스로 지킬 수는 없습니까?"라는 불순한 반문으로 반응했다. 가인은 하나님의 질문에 속임수로 빠져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된 무관심은 결국 믿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살해된 자의 피가 하나님께 소리치고 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범인은 자신의 책임을 결코 회피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속임수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가인처럼 우리들 자신의 행위를 거의 숨길 수 없다. 언제인가는 우리 모두는 가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질문받게 되고 결코 변명할 수 없게 된다. 이웃들을 위한 우리들의 책임을 우리들 스스로 결코 회피할 수 없다. 하나님에 의해 이들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존재들이고 하나님은 이들의 평안을 물으시며 또 이들을 찾게 될 것이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죄와 무죄가 갈라지게 되는 기로에서 우리 자신의 책임감이나 대답 내지 변론이 이웃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 "내가 나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반문처럼 질문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위한 대답을 하며 변호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가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금전을 주고받으며 위증은 물론 돈으로 거짓을 위조하기까지도 합니다. 이것이 나약한 개인이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대한민국 국가 기관조차도 서슴없이 하고 있는 슬픈 현실을 보게 됩니다. 진실과 공의를 지키고자 결코 침묵하지 않을 수 있는 복된 새로운 한 주간이 되시길......   샬~~~롬

   창 4, 1 - 16   행 10, 37 - 48   (지난 묵상 링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 4, 9)

   

 

배경 찬송은 "이슬을 보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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