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은 손을 놓고 보내주기

 

2016년 3월 26일

        

  

    예수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아주 감동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주역은 아리마데 요셉이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존경을 받는 의원이면서 "비밀리에 예수님 제자" (요 19, 38)였었다.
    그는 이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간구하는 일을 감행하고 나서 모든 일을 스스로 책임진다. 예수를 잘 알려지지 않는 이방인 장례가 아니라, 유태인의 풍습에 따라 장례를 지낸다.

    죽음을 넘어 얼마나 대단한 예수님에 대한 존중심이란 말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비밀스런"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 이웃들이 알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자세를 지켜보는가?! 하지만, 예수님 장례와 같은 그런 감격적인 일도 아니며, 아직 한가지 "부활에 대한 소망"이 결핍되어 있다. 예수님 무덤이 끝장이었다면, 또한 우리들 무덤도 절대적으로 끝장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밤에 이어 부활절 아침이 밝아온다. 관과 무덤을 뛰어넘어, 우리는 예수와 더불어 부활 생명을 살게 된다.

     부모님의 죽음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슬프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쉽사리 잊지 못하게 합니다. 심지어, 이미 명을 달리한 사람과 이별을 하지 못하고 관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때, "죽은 자의 관을 부여잡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여잡아라!"는 권면이 위로의 말이 될 것입니다. 떼어 놓는 일은 항상, 무엇보다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에 사로잡히게 되면,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로잡히면, 단지 잡고 몸부림치던 것을 마침내 놓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당신의 손에서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은 수난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 놓인 날, 불안의 시간,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죽음과 삶 사이에 놓여있는 하루인 토요일입니다. 부활생명을 위해 죽음과 잡은 손을 놓을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막 15, 42 - 47   호 5, 15 - 6, 3 (지난 묵상 링크)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막 15, 42 - 43)

   

   

 배경 음악은 Mozart의 "Kyrie eleison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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