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가지 선택은 하지만

 

2016년 3월 23일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명절 특별 사면으로 판결을 받은 죄수 하나를 풀어줄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제 바라바와 예수 그리스도, 두 사람이 선택 앞에 서 있다.
    
이들은 상이한 두 가지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바라바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세계를 위해 서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우리에게로 온 것이다.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사람들은 결정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할까?! 빌라도는 확실하게 예수를 기꺼이 구하여 석방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예수께 그 어떤 죄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빌라도는 백성들의 분위기에 포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를 조작하여 바라바를 선택하고, 이로써 하나님 뜻에 어긋나게 된다. '아버지의 아들'이란 의미를 가진 바라바, 즉 살인 범죄자가 풀려나고, 다른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모든 사람, 모든 이방인, 용기가 없는 모든 사람과 소망이 없는 모든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박되어 죽임을 당하게 자신을 내어 맡기신다. 이것으로써 우리가 자유를 얻고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다.

    우리 삶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일지도 모릅니다. 한국이 제 20대 총선을 앞두고 있듯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각종 선거를 통해서 선택하며, 교회 안에서도 집사와 장로를 선출하게 됩니다. 또한 활동하는 각종 사회단체에서도 회장과 책임질 임원들을 선출하게 됩니다. 사적인 영역에서도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직업과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거주할 집과 휴가지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선택에 따라 우리 자신의 삶이 결정되고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는 좋거나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하며,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이함들이 또한 우리 삶의 일부에 속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을 택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결정하느냐?"는 결단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들의 죄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막 15, 1 - 15   사 26, 20 - 21 (지난 묵상 링크)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막 15, 9)

   

   

 배경 음악은 "무엇이 변치않아"입니다.

    

  3 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