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전혀 없는

 

2015년 4월 1일

     

    빌라도는 위기에 처해 있다. 예수를 석방하게 되면, 자기 권력을 지지하는 유대인 상류층과 함께 망하게 될 위험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두 가지를 모두 피하기 위해 빌라도는 이미 확인된 강도를 석방해야만 했다. 빌라도는 꺾이고 이스라엘 군중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한다. 이른 아침에 움직였던 폭도들이 확실히 다수를 위해 대변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스스로를 위해 '이 어두운 법정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을 뜻한다. 빌라도는 이것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이 사도신경에서 거명될 정도로 큰 죄를 스스로 짊어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주목할만하며, 유다의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다의 배신은 인간적 비극을 보여주지만, 빌라도는 인간적인 비열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찌했든 비극과 비열,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포괄된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살인자들을 용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사는 "왕따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왕따 Mobbing"란 단어는 영어 "Mob" 즉 "선동된 폭도"란 용어로부터 유래하는 단어입니다. 빌라도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한 것처럼, 우리들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미 결정한 상태로 등장해서 모든 험담을 즉시 중단하고 나서야 마침내 진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사람을 왕따시킬 근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는 항상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문제가 전혀 제시되지 않고 힘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특별함과 용기에 대한 문제가 그릇된 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는 일로 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지 오점만 더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하고 살인자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일이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난과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복된 4월 초하루가
되시길......   샬~~~롬

 마 27, 15  -  30    사 26, 20 - 21  (지난 묵상 링크)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마 27, 22)

   

 

배경 찬송은 "겸손의 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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