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의 틈새에서

 

2014년 4월 19일

     

 

    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란 말인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 내렸다. 가까운 제자들은 아마도 이 일을 감당할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은 슬픔에 사로잡히고, 일부는 잡히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 장례 준비를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평소에 가깝게 지내지 않는 두사람이다. 요셉과 니고데모도 역시 놀랐음에 틀림없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들의 삶과 소망을 맡겼던 예수님이 중죄인처럼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믿었던 모든 것들이 도대체 잘못되었단 말인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 누가 무덤에 있었는지"에 대해 서로 상이하게 기술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 사랑의 봉사를 하는 존경받는 두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등장하고 있다.

    오늘은 수난 금요일과 부활 주일날 사이에 놓인 날, 슬픔과 불확신의 시간,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죽음과 삶 사이에 놓여있는 하루인 토요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슬픔이 숨쉬기조차도 어렵게 하고 중병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흐리게 하며 앞길이 막혀 계속 나아갈 가망성이 더이상 없을 때, "그  틈새에 살고 있는 때에 우리와 동행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불확신의 시간을 견디어 내야 할 때, 우리와 함께하옵소서"라고 우리는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가며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세월호'에 갇혀 죽음의 공포를 당하는 어린 생명들을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침몰한 세월호 안에 갇혀 고생하는 어린아이들도 부활의 아침을 맞을 수 있도록 간구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요 19, 31 - 42   호 5, 15 - 6, 3   (지난 묵상링크)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 19, 40)

   

 

배경 찬송은 Mozart의 "Kyrie eleison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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