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질병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2016년 1월 18일

        

 

    설교나 말씀선포가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께는 양자 모두가 떨어질 수 없을 만큼 함께 속한 것일까?! 복음서에서 치유는 오히려 예수님 사역의 부수적인 산물처럼 여겨졌었다.
    그런데, 마가는 처음 등장에서 죽음으로부터 부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치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늘 거듭해 치유 사건들을 대하게 된다.

    물론 병자에게는 몇 마디 좋은 말씀보다는 건강해지는 일이 늘 더 중요함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거저 소망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건강은 귀중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병든 자와 더불어 치유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술적인 치료와 기도 중에서 그만두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안에서 건강한 자는 물론 병자에게 모두 관심을 가지시는 구세주를 가졌음'을 망각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의학과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 Ἀσκληπιός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죽은 자도 다시 살렸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치유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을 건강하게 했으며 죽은 자를 다시 가족에게 되돌려 주었을지라도, 예수는 이 이 신화적 인물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화적인 '기적적 치유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에게서 고통이나 병을 없애면 치유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의술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인간 자체를 다르게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에서 고통이나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고통이나 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을 맞는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안목으로 삶에 대한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복된 새로운 한 주간이 
되시길 ......  샬~~~롬  

   막 1, 29 - 39   요일 3, 1 - 6 (지난 묵상 링크)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 1, 32)

   

   

 배경 음악은 "치유의 노래"입니다.

  

 1 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